더 큰 문제는 이들 정부 부채 비율이 높은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높은 재정 적자 비율까지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OECD 재정 적자 자료를 살펴보면, 미국,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이 GDP 대비 5%가 넘는 적자를 기록하는 국가들이다. 앞서 정부 부채가 높다고 언급된 나라들이 재정 적자 또한 높으니, 정부 부채가 계속해서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일본은 이미 부채가 너무 높아 더 이상 늘리기 어려운 한계 상황에 다다랐다.
막대한 정부 부채와 지속적인 재정 적자는 정부의 경제 정책 재량권을 심각하게 제약한다. 우선, 부채에 대한 이자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국방, 사회보장 등 필수 재정을 늘리기가 어려워진다. 일부 국가에서는 재정 지출 대비 이자 비용이 세금으로 걷은 돈의 8% 이상에 달하기도 한다. 경제가 어려울 때 재정 지출을 늘려 경기를 부양해야 하지만, 정부는 재정정책을 마음대로 쓸 수 없으니 한 팔이 묶인 운동선수와 같은 처지가 된다.
여기에 더해 금융정책이라는 다른 한 팔마저 묶여 정부는 이자율을 마음대로 낮추지 못한다. 정부가 국제 금융시장에서 채권을 팔기 위해서는 높은 이자율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를 낮추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인플레이션 우려뿐만 아니라, 막대한 미국 채권을 사줄 투자자가 없을 경우 금융시장이 요동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미국 채권을 서서히 팔고 있는 상황은 이러한 우려를 더욱 키운다.
미국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모두 같은 상황에 놓여 있으며, 영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재정정책과 금융정책, 양팔이 모두 묶인 선진국 경제 정책 당국은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극우 세력의 등장과 정정 불안으로 이어진다. 경제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지 못하니 정치권은 자꾸 다른 일로 주의를 돌리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요국들의 정부 부채 문제는 단순히 개별 국가의 위기를 넘어 세계 금융시장의 '발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 국가에서 문제가 터지면 다른 국가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2010년 남유럽 위기 당시 그리스 사태가 주변국으로 확산된 사례에서 이미 목격했다. 현재의 정부 부채 수준은 2차 세계대전 직후를 제외하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높으며, 경제 규모가 큰 국가들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요국들의 부채 문제가 터지면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극도로 높아져 주식, 채권 등 자산 시장이 불안정해지고, 국제 통화 및 환율도 급변동하며 통화 전쟁이나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될 우려가 커진다. 이 경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위기를 겪었던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부 유럽 국가들을 비롯하여 취약한 신흥국과 개발도상국들이 가장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미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큰 타격을 입은 신흥국들은 기적처럼 버티고 있는 곳이 많지만, 경제 불안은 정치 불안정으로 이어져 태국 총리 사퇴, 인도네시아 의회 방화 등의 사태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이제 한국 경제의 상황을 살펴보자.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정부 부채는 다른 주요국에 비해 대단히 안정적인 수준이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복지 지출 증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는 다른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이며 한국은 상대적으로 양호하다. 그럼에도 우리 언론과 정책 당국은 끊임없이 정부 부채 문제를 지적하며 재정 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엉뚱한 진단을 고집하는 것이 다시 IMF사태 전야를 보는 듯하다.
진정한 위기의 뇌관은 정부 부채가 아닌 가계 부채에 있다. OECD의 순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을 보면 한국은 180% 수준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계 부채 문제는 한국이 가장 취약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미국 등 다른 나라들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재정으로 국민 소득을 보전한 반면, 한국은 재정 지출 대신 대출을 늘려 가계 부채가 급격히 악화했다.
현재 한국 경제는 가계가 이미 대규모로 부실화되고 있다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어제까지 멀쩡히 장사하던 가게들이 갑자기 문을 닫고, 장사가 잘되던 곳조차 높은 임대료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폐업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이 주요국들의 정부 부채 문제로 인해 충격을 받을 때, 한국 경제는 안정적인 정부 부채에도 불구하고 취약한 가계 부채라는 아킬레스건에서 문제가 터질 가능성이 높다. 2008년 미국 경제 위기 역시 가계 부실화에서 시작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언론과 정책 당국은 여전히 정부 부채 문제라는 타령만 하고 있을 뿐, 정작 시급하고 위험한 가계 부채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책 마련을 등한시하고 있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할 때 충격은 커진다. 지금이라도 가계 부채 연착륙을 위해 거시건전성 규제를 강화하는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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