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군산시의 한 온실. 1,800평 규모의 토마토 하우스에서 채준희 나움농장 대표는 아침 일찍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화면에는 급액량, 배지 수분 함량, 배액 EC 수치가 실시간으로 흐른다. 이제 4년차에 접어든 청년농에게 농사는 숫자로 읽어내는 과학이 되었다.
"첫해엔 정말… 다 엎었어요. 바이러스가 돌아서" 채 대표의 말에는 아직도 그때의 막막함이 묻어난다. 8월에 심은 촉성재배 토마토 묘가 하나둘 시들어가던 그 겨울. 수확은 커녕 투입한 자본조차 건지지 못한 채 모든 것을 폐기해야 했던 순간이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배움의 물줄기가 희망을 싹 틔우다
농업대학 컨설팅 프로그램과의 만남이 전환점이었다. 주 1회 현장을 방문하는 전문가는 재배 기술만 가르치지 않았다. 작물의 생육 단계별 양분 관리, 환경 제어 시스템 운용, 그리고 무엇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리를 함께 전했다. "이 시기가 되면 이렇게 관리하자, 이때는 영양생장을 억제하고 생식생장으로 전환해야 한다…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작물을 읽는 눈이 생기더라고요."
작물의 부하 상태를 보고 착과량을 조절하고, 일장과 온도를 고려해 생명과 대화하는 기술을 체득하고 있다.
순환식 재배, 버려지던 것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다
1,000평 규모의 연동온실 한 동에 순환식 양액재배 시스템이 설치된 것은 작년이었다. 배액여과살균장치를 통해 버려지던 폐양액을 정화하고, 양분을 보정해 다시 작물에 공급하는 기술이다. 화학비료 사용량을 30% 줄이고, 농업용수를 절약하며, 무엇보다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는 지속가능한 농법이다.
"확실히 비료값이 줄더라고요. 원액하고 재활용 양액을 6대 4, 7대 3으로 섞어서 쓰니까 새로 추가하는 비료량이 확 줄었어요."
월 1~2회 업체가 방문해 배액의 EC와 pH, 주요 양분 농도를 분석하고 처방을 내린다. 한 번에 8만 원이 드는 검사 비용도 지원사업을 통해 해결했다. 데이터에 기반한 정밀한 양액 관리가 순환식 수경재배의 핵심이었다.
자연은 예측이 어렵다.
올해 여름, 기록적인 장맛비가 쏟아졌다. 온실 한 동이 물에 잠겼다. 연동온실 기둥 높이까지 차오른 물은 배지를 적시고, 뿌리를 질식시켰다. 다행히 물이 일찍 빠져 작물은 살았지만, 순환식 시스템은 가동을 멈춰야 했다.
채 대표는 "침수 후에 필터나 배관에 문제가 있을까 봐 아직 못 쓰고 있어요. 점검받고 제대로 다시 시작하려고요."
기후위기는 이제 농업 현장에서 가장 큰 변수가 되었다. 흐린 날이 계속되면 광합성이 떨어지고, 작물은 약해진다. 생육이 부진한 상태에서 기온이 떨어지면 난방비는 치솟는다. 수입은 없는데 지출만 늘어나는 시기였다. 청년농에게는 체력과 자본, 그리고 경영상태를 시험하는 시간이었다.
사람, 가장 어렵고도 소중한 자원
"처음엔 마을 어르신들 모시고 했는데, 허리가 안 좋으시니까 오래 못 하시더라고요."
인력 문제는 농업의 영원한 숙제다. 채 대표는 3년 전부터 합법적으로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다. 다행히 다른 농장에서 토마토 재배 경험이 있는 인력을 구할 수 있었다. 한국말도 제법 유창하고, 단순 작업은 물론 세심한 관리까지 함께 해낼 수 있는 동료들이다.
청년농으로서 느끼는 외로움도 있다. 같은 고민을 나눌 또래가 없다. 선배 농업인들의 조언은 귀하지만, 때로는 신기술 도입에 보수적이다. 농업 외 분야 친구들과는 일상의 결이 다르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지속가능성, 청년이 그리는 농업의 미래
"규모를 늘리는 것보다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게 목표예요." 채 대표의 말에는 조급함이 없다. 시설 투자 자금을 상환하고,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고, 그다음에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이다. 농업인이 아닌 농업 경영인으로, 현장에만 매달리지 않고 전체를 조망하며 관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GAP 인증과 지역 농산물 인증을 받아 학교급식에 2~3년간 납품하고 있다. 로컬푸드 직매장에는 주말 중심으로 물량을 조절해 출하한다. 욕심내지 않는 대신, 좋은 품질로 꾸준히 신뢰를 쌓는 전략이다.
"포장해서 내고, 안 팔리면 회수하고… 그런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확실히 팔릴 만큼만, 가격도 합리적으로 책정해서 내요."
순환하는 물처럼, 지속되는 삶을 꿈꾸며
토마토의 생육 주기는 명확하다. 개화와 착과, 그리고 과실이 커지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계절이 순환하듯 작물도 순환한다. 그리고 이제 양액도 순환한다.
" 한 번 쓰고 버리는 선형의 농업에서 자원을 재활용하며 환경과 공존하는 순환형 농업, 본격적으로 데이터 쌓아서 효과를 제대로 증명하고 싶어요."
26세의 나이에 1,800평 온실을 운영하며, 4년간 실패와 성공을 모두 경험한 청년농부. 그의 토마토 재배동에 흐르는 것은 지속가능성에 대한 믿음, 과학적 농업에 대한 열정, 그리고 더 나은 농업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가 그 물줄기 속에 함께 순환하고 있다.
군산의 한 온실에서 시작된 작은 실험이 만들어갈 내일의 농업을 기대해본다.
/이상훈 기자
사진제공: 전북특별자치도농업기술원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