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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이 묻는다 - ‘우선 검토 기준’은 어디로 갔나

김관춘 칼럼 / 논설위원
전북특별자치도가 1조 2,000억 원 규모의 인공태양(핵융합) 연구시설 부지 선정 결과에 대해 전례 없이 강도 높은 문제 제기에 나섰다. 전남 나주가 최종 사업지로 낙점되자 전북자치도는 즉시 이의신청을 제출했고, 필요하다면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단순한 지역 간 유치 경쟁을 넘어, 이번 결정이 국가 행정의 신뢰와 일관성, 더 나아가 공정성과 법적 원칙을 훼손했다는 판단에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은 앞으로 30일 동안 전북도의 이의신청을 검토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선정 결과’가 아니라 ‘선정 과정’에 있다.

우선, 전북자치도가 제기한 핵심 쟁점은 ‘과기부 공고문에 명시된 우선 검토 기준이 무시됐다’는 점이다. 공고문에는 “소요 부지는 지자체에서 무상 양여 등의 방식으로 즉시 소유권 이전이 가능한 지역을 우선적으로 검토한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단순한 참고 사항이 아니라 ‘우선권’을 부여하는 필수 기준이다.

그런데 이 조건을 현재 시점에서 충족하는 지역은 사실상 새만금이 유일하다. 전북도와 군산시는 과학기술출연기관법 제5조 3항을 활용해 ‘출연금 지원방식’을 제안, 연구기관이 농어촌공사로부터 부지를 직접 매입하는 구조를 만들어 완공 즉시 소유권 이전이 가능하도록 했다.이는 다른 지자체들이 향후 특별법 제정을 통한 무상 양여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북은 법률적·행정적으로 즉시 이행 가능한 조건을 갖춘 실제적 대안을 제시했지만, 경쟁 지자체들은 실현될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기초한 ‘미래형 계획’을 제출한 것이다. 전북이 “조건 충족 여부를 현재의 법률 체계가 아닌, 미래 입법 가능성으로 판단한 것은 명백한 절차적 하자”라고 지적하는 이유다.

유사한 사례는 이미 존재한다. 충북의 방사광가속기 사업의 경우도 무상 양여 안이 검토됐으나, 최종적으로는 ‘50년 임대 + 50년 갱신’ 방식으로 정리됐다. 특별법 제정이 총체적 무상 양여를 보장하는 수단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럼에도 특정 후보지의 제안만을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이유로 더 우선 평가한 것이라면, 이는 평가 기준의 적용이 정무적, 자의적이었다는 해석을 피할 수 없다.

둘째, 이번 선정 결과는 ‘신뢰 보호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비판도 거세다. 행정기본법 제12조가 규정하는 이 원칙은 국민과 행정기관 간의 약속과 기대를 보호하는 중요한 법적 장치다. 전북은 지난 16년간 정부와 일관되게 핵융합 인프라 조성 로드맵을 함께 추진해 왔다.2009년 전북도·군산시·국가핵융합연구소가 체결한 MOU를 시작으로, 2011년에는 새만금위원회가 ‘한국형 핵융합 실증로’를 기본계획에 포함시켰다. 2012년 플라즈마기술연구소가 개소하며 1단계 사업이 실현됐고, 2019년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정책연구에서도 새만금 부지에 핵융합 연구단지 조성이 제안됐다.전북도는 이를 근거로 2021년 새만금 기본계획에 과학기술 실증단지를 반영했고 올해 초에는 연구시설용지 10만 평을 실제로 확보했다. 16년간 지속된 정책의 연속성, 정부와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투자와 준비였지만, 이번 결정은 이러한 축적된 행정적 신뢰 관계를 일순간에 무너뜨린 셈이다. 한번 무너진 행정의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을뿐 아니라,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그간의 많은 사례가 증명했다.

셋째, 사업 추진 속도 측면에서도 전북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새만금 부지는 농어촌공사가 소유한 단일 필지로, 행정적·법적 절차가 간명하다. 토지보상 문제는 대규모 국가사업의 가장 큰 지연 요인으로 꼽히는 만큼, 2027년부터 본격 추진되는 인공태양 인프라를 고려하면 신속하고 안전한 집행이 가능한 부지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평가 결과 어디에서도 이 장점이 제대로 반영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 사안은 단순히 전북이 탈락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 공모 사업의 기준이 명확히 제시되고 있음에도, 실제 평가에서는 임의로 재구성되거나 특정 후보지에 유리하게 해석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만약 ‘우선검토사항’이 평가에서 사실상 무시됐다면, 이는 행정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다. 지역 간 경쟁을 넘어 국가 정책의 공정성과 신뢰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그 후과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전북의 이의신청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평가의 공정성 회복, 행정 절차의 일관성 확보, 정부와 지자체 간 신뢰 관계의 재정립이라는 대의를 위한 문제 제기다. 과학기술 분야의 대형 국책사업은 몇몇 평가위원의 자의적, 주관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투명성, 예측 가능성, 법적 절차 준수라는 기본 원칙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핵융합은 대한민국 미래 에너지 체계의 전략 자산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공정한 절차와 확실한 기준 위에서 사업이 추진되어야 한다. 이번 이의신청 과정은 행정 신뢰를 회복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과기정통부와 한국연구재단은 전북의 문제 제기를 단순한 지역 이기주의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제기된 절차적 의문을 투명하게 해소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가 대형 공모 사업에서 “공고문보다도 정치적 판단이 우선한다”는 잘못된 선례만 남길 뿐이다. 이번 졸속 결정은 공정과 상식, 절차적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 글쓴날 : [2025-11-25 13: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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