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필자가 만난 당시 계엄군의 한 장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은 우울증 치료를 받아온 지 오래이고, 자신도 의료기관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교는 특전사 소속으로 그날 국회 본청에 진입했었다.
“국회의원 끌어내라”는 지시를 이행하지 못하고 국회에서 쫓겨나다시피 철수한 직후 부대에 복귀한 때는 12월 4일 새벽 4시 20분경. 여단 참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전을 그 따위로 밖에 못하냐”는 질책이 쏟아졌다. 국회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가 국회의원을 끌어내지 못한 데 대한 추궁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자신을 질책하던 지휘부는 언론에 자신들이 계엄 당일에 윤석열 대통령의 “국회의원 끌어내라”는 지시를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며칠 전과는 전혀 다른 태세 전환이었다.
이후 여단장의 직무가 정지되고 다른 장성이 새 직무대리로 부임하고서야 이 장교는 “당신이 민주주의를 지켰다”는 위로를 받았다. 거의 반년 동안 ‘작전에 실패한 장교’로 낙인찍혀 심적 고통을 당해야 했던 처지에서 겨우 벗어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심적 혼란과 고통이 살아나 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른 것이다. 혼자만 알고 사비로 치료를 받기 때문에 부대에서는 이 사실을 모른다. 이런 심적 고통은 통계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12·3 내란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폭풍이며, 어떤 점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전쟁이다.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국회에 출동한 것이 “뭐가 잘못이냐”며 자기 정당화를 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조직은 출동한 계엄군 장교들에게 통화 기록과 녹취록을 삭제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대부분 삭제되었으나 극히 일부 통화 녹취록과 파편적인 증거들이 모여 현재 내란 재판에서 공개된 상황이다. 계엄 당시에 특전사와 수방사, 방첩사는 작전일지조차 작성하지 않았고, 작전 부대의 이동상황은 합참의 전술지휘통제 시스템에 기록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그림자 정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체의 기록을 남기지 않기로 한 계엄부대의 사령관들과 달리 당시 참모와 일부 부하들은 양심 고백과 휴대폰 통화 녹취록, 부대 CCTV와 같은 기록들을 모아 상황을 재구성하고 공수처와 검찰의 수사에 협조하였다. 증거인멸과 말맞추기 지시에 응하지 않고 집단으로 항명한 방첩사령부의 영관급 장교들의 집단 행동도 있었다.
그 날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혼란과 고통의 근원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간간이 언론을 통해 회고성 보도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보도에서조차 외면되고 있는 계엄군과 그 가족의 트라우마는 더욱 심각하다. 아직도 내란의 우두머리와 중요 종사자들은 진정성 있는 사죄와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중요 종사자들의 버티기 전략으로 인해 계엄을 둘러싼 일련의 행동계획과, 비상대권에 의한 통치 구상은 아직도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아직 내란이 끝나지 않았다는 불편한 현실을 드러낸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수사와 재판만으로 ‘인지전’ 개념의 쿠데타 본질 밝혀낼 수 있을까? 12·3 내란의 기원과 성격, 그 전모를 추적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작업이거니와, 한국 민주주의의 현 상태를 진단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이루어 낸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서사를 재구성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경과되도록 이 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와 기록물 정리,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 주로 사법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사건 발생 이후 검찰 특별수사본부, 공수처, 국가수사본부의 수사를 바탕으로 출범한 내란특검에 의한 수사가 진행되었고,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이 있었으며, 현재 서울중앙지법에서 내란 우두머리와 중요 가담자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러한 사법 과정은 내란 중요 인물들에 대한 형사적 책임을 묻는 과정에 국한되기 때문에 12·3 내란에 내포된 정치·사회적인 맥락을 포착하는 데 한계가 있다.
2024년의 12·3 내란이 1979년의 12·12사태, 1980년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때와 동일한 군 부대에 의해 실행된 친위쿠데타임에도 불구하고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분석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12·3 사태는 권력자의 변덕과 충동, 그 권력자를 추종하는 소수의 세력들에 의해 갑자기 벌어진 사건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계엄은 비록 권력자의 비논리적인 충동에 의해 결행되었다 할지라도 계엄의 설계와 실행은 군사 지휘체계라는 관료 기능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부터 계엄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을 단계적으로 충족하면서 이루어진 과정이다.
특히 이번 사태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국가의 신경과 동맥을 차단하려던 과거의 방식과 달리, 동원된 무력의 규모를 최소화하고, 여론의 심장부를 정밀타격하는 빠른 기동전을 주축으로 하는 양상으로 변화했다. 그 과정에서 대안언론에 의한 여론정치라는 현대적 요인을 고려한 ‘인지전(cognitive warfare)’ 개념으로 재설계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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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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