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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찾아오는 전북, 1조 원 벤처펀드의 시작

김관춘 칼럼 / 논설위원
전북자치도가 벤처펀드 1조 원 시대를 열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하나의 성과 지표에 불과할 수 있지만, 지방소멸이라는 구조적 위기 속에서 이 성과가 갖는 함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전국 벤처투자의 약 70%가 수도권에 집중된 현실에서, 인구와 산업 기반이 상대적으로 열세인 전북이 1조 원 규모의 벤처펀드를 조성했다는 사실은 ‘투자는 수도권에서만 가능하다’는 오래된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는 사건이다. 이는 단순한 재정 확대가 아니라, 지역 경제의 생존을 떠받치는 ‘경제 방파제’를 구축했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간 전북은 기술력과 잠재력을 갖춘 기업들이 성장 단계에서 자금난에 부딪혀 수도권으로 이전하거나 외부 자본에 종속되는 ‘투자 불모지’로 인식돼 왔다. 기업이 떠나면 일자리가 사라지고, 인구 감소는 다시 지역 경제를 위축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번 벤처펀드 1조 원 달성은 이러한 구조적 고리를 끊고, 지역 안에서 기업을 키우고 성장의 결실을 다시 지역에 환원할 수 있는 자생적 금융 생태계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지방소멸 위기에 맞선 대응책이 구호나 단기 사업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투자 구조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벤처펀드는 보조금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보조금은 한 번 쓰고 나면 사라지지만, 펀드는 ‘출자–투자–회수–재투자’라는 선순환 구조를 통해 제한된 재원을 반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전북 벤처펀드는 도 출자약정액 896억 원을 마중물로 정부재정 5,489억 원, 민간자금 4,609억 원을 끌어들여 총 1조 원 규모로 조성됐다.

공공의 의지가 민간 자본을 견인하고, 다시 그 자본이 지역 기업의 성장을 통해 회수돼 재투자로 이어지는 구조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일회성 지원이 아닌, 지역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정책 수단이다.

전북의 성과가 더 의미 있는 이유는 행정 방식의 혁신에 있다. 전북자치도는 지자체 최초로 펀드 투자 전담조직을 설립해 전문성을 확보했다. 벤처투자라는 고도의 전문 영역을 외부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고, 도가 직접 기획·운영함으로써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했다.

기업 유치, 규제 해소, 투자 지원을 각각의 사업으로 분절하지 않고 하나의 정책 흐름으로 연결한 점도 주효했다. 투자가 필요한 기업을 발굴하고, 규제 문제를 함께 풀며, 자금까지 연계하는 ‘원스톱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상생 모델 역시 전북형 벤처펀드의 중요한 특징이다. 전국 최초로 세컨더리 펀드를 도입해 초기 투자자의 회수 부담을 덜었고, 시군 출자 대행 제도를 통해 기초지자체와 지역 선배기업의 자금을 지역 투자로 유도했다.

익산시와 정읍시의 출자가 실제 지역 기업 투자로 이어졌고, 비나텍·성일하이텍 등 선배기업들이 후배기업 육성에 동참하면서 지역 내부의 연대 구조도 강화됐다. 전북과 협력하는 VC가 44개 사로 확대되고, 스케일업 TIPS 운용사 다수를 유치한 것은 이러한 정책 신뢰의 결과다.

한편으로, 벤처펀드 정책의 성패는 투자 규모 자체보다 그 이후의 ‘관리와 확장’에 달려 있다. 투자가 단발성 성과로 그친다면 지역 경제의 체질 개선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전북은 이미 투자 이후 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후속 체계를 고민해야 할 단계에 들어섰다.

기술 고도화와 판로 개척, 인재 유입을 연계하는 종합 지원이 뒷받침될 때 벤처펀드는 진정한 성장 엔진으로 기능한다. 특히 수도권에 집중된 연구 인력과 전문 인재를 지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주거·교육·문화 여건까지 포괄하는 정책 연계가 필요하다.

또한 전북형 벤처펀드는 지역 산업 구조 전환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농생명·에너지·이차전지·바이오 등 전북이 강점을 가진 분야에 전략적으로 투자해 산업 간 융합을 촉진한다면, 단순한 기업 숫자 증가를 넘어 고부가가치 산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 이는 청년 일자리 창출과 인구 유입으로 이어져 지방소멸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완화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중앙정부 의존에서 벗어나 지역이 주도적으로 자본을 설계하고 운용하는 경험 역시 중요한 자산이다. 전북의 사례는 다른 비수도권 지역에도 실질적인 정책 모델을 제시한다. 지역이 스스로 성장의 판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전북 벤처펀드는 단순한 지역 정책을 넘어 국가 균형발전 전략의 실험장이 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흔들림 없는 정책 지속성과 도민의 신뢰다. 축적된 성과 위에 더 과감한 도전을 더할 때, 전북은 지방소멸 위기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성장 서사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1조 원 달성은 목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선이다. 전북은 ‘기업을 찾아다니는 지역’에서 ‘기업이 찾아오는 지역’으로 전환하겠다는 각오로 펀드 정책에 더욱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투자 규모의 확대뿐 아니라, 산업별·성장 단계별로 더욱 정교한 투자 전략을 마련하고, 투자 이후의 성장 지원까지 책임지는 동반자 역할이 요구된다. 지방소멸 위기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 정책 선택에 따라 기회로 전환될 수 있다. 전북 벤처펀드 1조 원은 그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다. 이제 이 방파제가 지역 경제를 지켜내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성장의 물결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 글쓴날 : [2025-12-23 1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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