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직 단체장 간의 갈등과 정책 뒤집기가 결국 시민의 삶과 지역 재정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또다시 반복됐다. 남원시가 전임 시장 시절 추진된 테마파크 조성 사업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가 대법원에서 패소하며 약 500억 원에 이르는 손해배상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행정 판단 착오를 넘어, 지방자치의 기본 원칙과 책임 행정이 얼마나 허술하게 작동해 왔는지를 드러내는 뼈아픈 경고다.
문제의 핵심은 정책의 연속성 상실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은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나 선거 결과에 따라 손쉽게 뒤집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행정은 연속성을 전제로 신뢰를 쌓아야 하고, 민간과의 약속 역시 법과 원칙 위에서 존중돼야 한다.
그럼에도 남원시는 ‘부적절한 협약’과 ‘과다한 사업비’를 이유로 기존 협약을 무효화하며 사용·수익 허가를 불허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정당한 사유 없는 행정 지연으로 판단했고, 그 책임을 명확히 남원시에 물었다. 그 결과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막대한 재정 부담으로 돌아왔다.
500억 원은 남원시 한 해 예산의 5%를 넘는 큰 금액이다. 복지, 교육, 안전, 지역경제에 쓰였어야 할 소중한 재원이 소송 비용과 배상금으로 사라지게 된 셈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수년간의 법적 다툼 끝에 해당 시설이 지역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기는커녕, 가동이 중단된 채 흉물로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책 실패의 대가는 단지 숫자로 끝나지 않고, 도시의 신뢰와 미래 가능성까지 잠식한다.
이번 사태는 특정 단체장 한 사람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다. 무리한 보여주기식 사업 추진, 과도하게 부풀려진 수요 예측, 졸속 협약 체결, 그리고 정치적 대립 속에서 정책을 뒤엎는 결정까지, 전·현직 행정 모두가 자유로울 수 없다. 시민사회단체들이 전·현직 시장 모두의 책임을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임을 분명히 묻지 않는다면 유사한 행정 실패는 언제든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번 남원시 사례가 더욱 심각한 이유는 이러한 정책 실패가 결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국 곳곳에서 전임 단체장의 역점사업을 ‘적폐’나 ‘졸속’으로 규정하며 무리하게 중단하거나 변경했다가 소송에 휘말리고, 결국 패소해 막대한 배상금을 떠안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이는 개인의 판단 착오라기보다 지방행정 전반에 구조적으로 내재된 취약성을 보여준다. 선출직 단체장 중심의 강력한 권한 구조 속에서 정책 결정이 충분한 숙의와 검증을 거치지 못한 채 추진되거나, 반대로 정치적 이유로 성급히 폐기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문제는 책임의 실종이다. 수백억 원의 손실이 발생했음에도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행정적 책임을 지는 주체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임기를 마친 전임 단체장은 ‘이미 떠난 일’로 선을 긋고, 현직 단체장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을 뿐’이라며 책임을 분산시킨다. 그러나 행정은 개인의 임기보다 길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시민의 삶에 누적돼 고통으로 돌아온다. 책임을 묻지 않는 구조에서는 동일한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단체장의 정치적 결단에만 의존하는 행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는 사업일수록 사전 단계에서 시민 공론화와 숙의 과정을 의무화하고, 사업 추진과 중단에 따른 재정·법적 위험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또한 정책 변경으로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을 사전에 점검하는 ‘정책 리스크 평가 제도’ 도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책의 성공 가능성뿐 아니라, 실패 비용까지 시민 앞에 솔직히 드러낼 때, 무책임한 결정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는 사업임에도 충분한 검증과 토론, 사전 경고는 부족했다. 시민과 시민단체 역시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협소했다. 그 결과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을 기회는 사라지고, 모든 부담은 사후적으로 시민에게 전가됐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견제와 감시의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방의회는 집행부를 감시하고 정책의 타당성을 점검해야 할 책무를 지닌다. 의회가 집행부의 거수기로 전락한다면 지방자치는 공허한 구호에 그칠 뿐이다.
전문성을 갖춘 정책 검증 시스템, 상시적인 행정 감시 체계, 그리고 소수 의견도 존중받는 의정문화가 뒷받침돼야 한다. 여기에 시민사회가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창구를 넓힌다면 행정의 오류를 사전에 차단할 가능성은 훨씬 커질 것이다.
이제라도 교훈을 분명히 해야 한다. 첫째, 대형 개발사업에 대한 타당성 조사와 수요 예측은 정치적 성과가 아닌 객관적 데이터와 전문성에 기반해야 한다. 둘째, 단체장 교체와 무관하게 정책의 법적 안정성과 행정의 연속성을 지킬 제도적 장치가 강화돼야 한다. 셋째, 지방의회의 견제 기능을 실질화하고, 시민과 시민사회가 정책의 기획·집행·평가 전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지방자치는 주민의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제도이지, 정치적 다툼의 무대가 아니다. 무책임한 정책 뒤집기와 사후 변명으로 혈세가 낭비되는 일이 더 이상 반복돼서는 안 된다. 이번 남원시 사태를 값비싼 수업료로 끝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임 행정과 참여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근본적 변화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것이 시민의 삶을 존중하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도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