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연구원의 뼈아픈 일침
올해 초 전북을 들썩이게 한 대기업의 초대형 투자 낭보는 가히 역사적이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새만금과 전북 일대에 수소, 로봇,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총 9조 원 규모의 투자를 추진하기로 하면서 전북 경제의 판도를 바꿀 ‘게임 체인저’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광활한 부지와 복합 테스트베드라는 강점을 지닌 새만금이 미래 첨단산업의 거점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맞았다는 평가도 뒤따랐다.
그러나 기대감만으로 지역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전북연구원이 발표한 이슈브리핑은 환호 속에 가려진 전북 산업구조의 취약성을 냉정하게 짚어냈다. 연구원이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대규모 민간 투자가 이뤄지더라도 이를 뒷받침할 연구개발(R&D)과 산업진흥 생태계가 구축되지 않으면 투자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북은 과거에도 대규모 생산시설 유치에 성공했지만, 기획과 연구, 설계 등 고부가가치 기능은 수도권에 남고 지역은 생산기지 역할에 머무르는 구조적 한계를 경험해 왔다. 현대차의 9조 원 투자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 혁신을 지원하고 국책과제를 기획하며 산업 발전 방향을 설계하는 핵심 기능이 지역에 자리 잡지 못한다면 새만금은 또 하나의 생산기지에 머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전북연구원이 제시한 해법은 주목할 만하다. 정부가 추진하는 제2차 공공기관 이전을 단순한 지역 안배 차원이 아니라 현대차의 AI·로봇·수소 산업 투자와 연계한 전략적 정책수단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차가 새만금에 대규모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제조현장의 AI 전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 관련 기관의 전북 이전 또는 기능 이전을 검토할 수 있다는 제안이다. 민간기업의 투자와 공공 연구기관의 역량이 결합할 때 산업 생태계의 경쟁력은 더욱 커질 수 있다.
로봇과 수소 분야도 마찬가지다. 전북이 보유한 지능형 농기계 실증 인프라와 현대차의 피지컬 AI 기술을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KAIA), 과학기술사업화진흥원(COMPA) 등의 연구기획 역량과 연결한다면 연구개발에서 실증, 사업화로 이어지는 선순환 체계 구축이 가능해진다. 완주 수소특화산단과 부안 수전해 산업 기반 역시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KETEP)과 같은 국가 에너지 R&D 전문기관과의 연계를 통해 더욱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전북도와 정치권의 논리도 진화해야 한다. 과거의 공공기관 유치 논리가 지역 균형발전과 낙후성 해소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제는 국가 전략산업 육성과 민간 투자 성공을 위한 필수 인프라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현대차의 대규모 투자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 필요한 연구개발과 산업지원 기능을 전북에 함께 배치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적 투자 효과를 극대화하는 길이다.
결국 관건은 실행력과 속도다. 대기업의 투자 일정에 맞춰 공공기관 이전과 연구개발 인프라 구축이 병행돼야 하며, 도내 대학과 기업, 연구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산학연 협력체계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새만금이 단순한 산업단지가 아니라 기업과 연구기관, 대학이 함께 혁신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융합 플랫폼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의미다.
9조 원의 투자는 전북에 주어진 소중한 기회다. 그러나 기회는 준비된 지역만이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민간의 대규모 투자 위에 공공 연구개발 역량과 산업 생태계라는 단단한 토대를 쌓을 때 비로소 새만금은 대한민국 미래산업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지금 전북이 집중해야 할 것은 투자 규모에 취하는 일이 아니라 그 투자에 알맹이를 채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