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이고,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를 책임지는 기관은 선거관리위원회다. 그렇기에 선관위는 그 어떤 국가기관보다 엄정하고 투명해야 하며, 국민의 참정권을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 그러나 최근 중앙선관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노태악 전 중앙선관위원장을 비롯한 전·현직 간부들에 대한 수사의뢰를 권고하면서 선관위를 둘러싼 국민적 신뢰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진상규명위는 지방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투표용지 관리 부실과 보고체계 미작동, 지휘·감독 소홀 등을 확인하고 관련 책임자들에 대한 수사와 징계를 권고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착오나 현장 실무자의 실수로 치부할 수 없는 문제다. 국민의 주권 행사가 이뤄지는 선거 현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관리 체계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선관위 조직 전반의 총체적 실패를 의미한다.
더 주목해야 할 대목은 책임의 화살이 실무진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동안 공공기관에서는 사고가 발생하면 하급 직원 몇 명의 징계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일이 반복돼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최고 책임자까지 수사의뢰 권고 대상에 포함됐다. 이는 권한을 가진 자가 책임도 져야 한다는 상식이 비로소 적용된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선관위는 헌법기관이라는 특수성을 이유로 독립성을 강조해 왔다. 물론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독립성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독립성이 무책임의 방패가 될 수는 없다. 통제받지 않는 권한은 결국 오만으로 이어지고, 오만은 조직의 부실과 폐쇄성을 키운다. 이번 사태는 독립성과 책임성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시작점이다. 국민이 선거 결과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의 근간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지금 선관위에 필요한 것은 변명도, 책임 회피도 아니다. 국민 앞에 진솔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철저한 진상 규명과 제도 개선을 통해 신뢰 회복에 나서는 일이다.
선관위의 위기는 투표용지 부족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는 문화에서 비롯됐다. 독립성 뒤에 숨은 무책임을 걷어내지 못한다면 선관위를 향한 국민의 불신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