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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밭의 풍경

배해수 / 무형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고고인류학 박사

한낮이 밤보다 길어지는 하지가 지나면 계절은 소서와 대서를 향해 나아간다. 그 사이에는 초복, 중복, 말복이 이어진다. 절기는 단순히 날짜를 나누는 기준이 아니다. 선조들은 계절이 바뀌는 흐름을 몸으로 익히고 그것을 스물네 개의 절기로 정리하였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위해 징검다리를 놓듯, 자연의 변화를 생활의 기준으로 삼은 지혜였다. 농사를 중심으로 살아온 오랜 경험이 축적된 삶의 달력이기도 하다.

얼마 전 전북 완주의 한 감자밭을 찾았다. 이른 아침부터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감자를 수확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호미로 한 알씩 캐는 모습은 아니었다. 감자 수확기를 부착한 경운기가 밭을 지나가면 흙속의 감자가 땅 위로 쏟아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일일이 주워 자루에 담았다. 잡초를 제거하는 예초기와 감자를 캐는 경운기, 포대를 옮기는 트랙터까지 여러 기계가 쉼 없이 움직였다.
기계가 농사의 많은 부분을 대신하고 있지만 마지막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흙 위로 올라온 감자를 골라 담고, 상한 것을 구분하고, 자루를 묶는 일은 기계가 대신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넓은 밭에서 한국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들이 수확을 맡고 있었고, 젊은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 밭에서 만나는 젊은 여성은 대개 농장의 주인이거나 가족이었다.

논농사는 기계화가 상당 부분 이루어졌지만 밭농사는 지금도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한다. 사람 없이 밭농사는 유지되기 어렵다. 문제는 그 사람을 찾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현실이다. 농촌의 고령화는 오래전부터 이야기되어 왔지만 이제는 세대가 이어지지 않는 문제가 더 큰 걱정이 되고 있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으면 기술도, 경험도, 삶의 방식도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음 세대와 연결될 때 비로소 이어진다. 사람이 끊기면 기술도 끊기고, 문화도 끊기며, 공동체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지혜 역시 함께 사라진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적어도 농업만큼은 사람의 경험과 손길을 완전히 대신하기 어렵다. 흙의 상태를 살피고, 하늘의 기색을 읽으며,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기억하는 일은 오랜 시간 축적된 삶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문화인류학에는 ‘한 노인이 세상을 떠나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고, 한 여성 노인이 세상을 떠나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삶에는 그 시대가 축적한 지식과 경험, 공동체의 기억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농부 한 사람이 평생 쌓아온 경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기술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오랜 세월 이어온 삶의 기록이다.

농업은 오랫동안 국가 산업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국제 개방과 여러 차례의 무역 협상 속에서 첨단산업과 제조업의 성장을 위해 가장 먼저 양보를 요구받은 분야도 농업이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많은 성장의 이면에는 묵묵히 희생을 감내한 농업인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를 지나 다시 한여름으로 향하는 계절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절기가 해마다 변함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농업 또한 다음 세대로 이어져야 한다. 밭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의 손길이 존중받고, 농사가 다시 희망으로 이야기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남겨야 할 가장 소중한 삶의 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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