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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三伏), 여름을 건너는 징검다리

배해수 / 무형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고고인류학 박사
더위에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긴다. 괜히 벽에 걸린 달력을 넘겨 보게 된다. 오늘이 며칠인지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더위 속에서 조금이라도 가까워진 가을을 먼저 만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시골 텃밭에서 풀을 매다 밭고랑 끝에 서서 허리를 폈다. 밭둑을 스쳐 오는 바람마저 뜨거웠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훔치며 문득 집 안 벽에 걸린 달력이 떠올랐다. 지금쯤 어디쯤 와 있을까. 초복은 지났을까. 입추는 아직 멀었을까. 몸은 여전히 한여름 들녘에 서 있는데 마음은 벌써 달력 한 장을 넘기고 있었다.

7월 달력을 펼치면 초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며칠 뒤에는 일 년 가운데 가장 덥다는 대서가 기다리고, 다시 중복이 이어진다. 여기까지 오면 비로소 달력 한 장을 넘길 수 있다. 8월에는 입추가 기다린다. 뜨거운 햇살은 여전히 대지를 달구고 있는데 달력은 벌써 가을이 문턱에 와 있다고 알려 준다. 그 아래에는 말복이 있고,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이 이어진다. 다시 며칠을 더 내려가면 처서다. 처서에는 모기의 입도 비뚤어진다고 했다. 달력 한 장을 넘겼을 뿐인데 마음은 벌써 말복을 지나 입추 언덕에 올라서 있다.

생각해 보면 절기와 삼복은 계절을 잘게 나누어 놓은 선조들의 지혜였다. 한여름을 한꺼번에 견디라고 했다면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래서 초복을 지나면 중복을 바라보고, 중복을 넘기면 말복을 기다리며, 다시 입추와 처서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도록 길을 만들어 두었다. 강을 건널 때 징검다리를 하나씩 밟듯, 계절도 그렇게 건너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가끔 현실보다 마음이 먼저 시간을 앞질러 간다. 유난히 긴 오후에는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달력을 넘기는 일은 시간을 속이는 행동이 아니다. 축지법이라도 쓰듯 마음만 먼저 가을 가까이 다녀오는 일이다. 현실은 변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숨이 조금 편안해진다. 내일이 오늘보다 시원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견딜 힘이 생긴다.

삼복 역시 그런 마음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봄부터 이어진 농사일로 기운이 가장 떨어지는 시기, 잠시 몸을 돌보고 원기를 회복하라는 삶의 신호였다. 복(伏)이라는 글자에는 엎드려 쉰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더위를 이기도록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조선에서는 관리들에게 얼음을 받을 수 있는 빙표를 내렸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백성들은 가까운 곳에서 구할 수 있는 먹거리로 기운을 보충했다. 지역에 따라 개고기나 닭고기, 미꾸라지, 장어를 먹기도 했고, 그것이 복날 풍속으로 이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풍경은 크게 달라졌다. 개는 집을 지키는 가축에서 가족이 되었고, 식문화와 사회의 인식도 함께 변했다. 이제 복날의 음식은 삼계탕이든, 추어탕이든, 장어구이든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음식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지친 몸을 추슬러 다시 일상을 살아가려는 마음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은 어느 날 갑자기 훌쩍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무더위에 지친 사람에게 하루는 유난히 길고, 오후의 햇살은 좀처럼 기울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달력을 넘긴다. 오늘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견딜 수 있는 내일을 먼저 만나기 위해서이다.

달력은 날짜를 적어 놓은 종이가 아니다. 계절을 건너는 지도이자 마음을 쉬게 하는 징검다리이다. 초복이라는 돌 하나를 밟고, 중복이라는 돌 하나를 밟고, 말복을 지나 입추와 처서를 향해 걷다 보면 어느새 뜨거웠던 여름도 우리보다 먼저 저만치 걸어가 있을 것이다. 선조들은 그 돌마다 이름을 붙여 달력에 남겨 두었다. 무더운 날이면 괜히 달력 한 장을 넘겨보게 되는 이유도, 아마 그 오래된 지혜를 우리 마음이 아직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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