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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만 존재하는 기술자, 행정 방임이 키운 통신 안전의 구멍

최준호 / 전북타임스 대표
거대한 빌딩의 지하 통신실. 수십 개의 네트워크 케이블과 보안 장비, CCTV 및 출입통제 시스템이 쉼 없이 꺾이고 이어지며 건물의 신경망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 건축물에서 정보통신 설비는 단순한 편의 장치가 아니다. 비상시 화재 알림부터 보안, 데이터 통신까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핵심 사회기반시설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지해 정부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 전문 자격을 갖춘 기술자를 두도록 하는 ‘정보통신설비 유지관리자 선임 제도’를 도입했다. 법의 입법 취지는 명확하다. 자격 있는 전문가가 현장에서 책임 있게 설비를 점검·관리함으로써 통신 장애와 비상 대형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의 실상은 어떠한가. 법제도의 높은 이상이 무색하게도, 편법과 행정 사각지대가 횡행하며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시한폭탄으로 작동하고 있다.

최근 언론을 통해 드러난 실태는 충격적이다. 기술자가 현장에 상주하거나 정기 점검을 수행하기는커녕, 이름만 빌려 서류상으로만 존재를 증명하는 ‘명의대여’와 ‘유령 관리자’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를 감시하고 바로잡아야 할 행정 당국의 태도다. 현행 행정 관행은 4대 보험 가입 여부나 실제 근로·재직 상태를 증명하는 엄밀한 실태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오직 업체가 제출한 ‘재직증명서’ 한 장에 의존해 실제 고용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는 이러한 형식주의적 행정은, 엄연히 불법 명의대여와 편법을 행정이 사실상 방조하고 수수방관하는 것에 다름없다.

여기에 지자체 간 ‘칸막이 행정’까지 더해져 사각지대를 키우고 있다. 기술자 1인당 부실 점검을 막기 위해 법적으로 허용된 관리 대상은 최대 5곳이다. 하지만 이 규정은 행정구역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무용지물이 된다. A 시에서 이미 5곳의 선임 용량을 채운 기술자가 B 구, C 군으로 이동해 추가로 5곳, 10곳의 건물을 중복 선임해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전국 통합 전산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실제 인력을 고용하지 않고 서류상 기술자만 올려놓은 편법 업체들은 저가 ‘덤핑 수주’로 시장을 어지럽힌다. 반면, 정당하게 인력을 채용하고 규정대로 정기 점검을 수행하는 성실한 전문 업체들은 가격 경쟁에서 밀려 설 자리를 잃고 폐업 위기로 몰리고 있다. 법을 준수하는 자가 피해를 보고, 편법을 저지르는 자가 이득을 취하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정작 비상사태나 통신 장애가 발생했을 때 현장에 달려올 실질적 관리자가 없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안전의 부실로 직결된다.

이제 정부와 지자체는 더 이상 행정의 방임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정보통신 설비의 안정적 관리가 곧 국민 안전과 직결된다는 제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철저하고 엄정한 제도 관리에 나서야 한다.

첫째, 재직 확인 절차의 실효성을 즉각 강화해야 한다. 형식적인 재직증명서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4대 사회보험 가입 증명서 제출을 의무화하여 실제 고용 관계와 근로 실태를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가짜 재직 증명으로 선임을 받은 것이 적발될 경우 엄중한 행정 처분과 법적 책임을 물어 무책임한 행정 방임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둘째, 전국 단위의 ‘통합 선임관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관련 전문 협회, 지자체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공유하는 통합 DB를 신설해야 한다. 기술자 한 명이 전국 어디서든 5곳을 초과하여 중복 선임 등록을 시도할 경우, 시스템상에서 자동으로 차단되는 실시간 검증 체계가 마련되어야 칸막이 행정의 허점을 막을 수 있다.

셋째, 현장 실태조사와 법적 처벌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서류 신고접수 수준에 머무르는 소극적 행정에서 벗어나, 지자체와 전문기관이 합동으로 현장 불시 점검을 정례화해야 한다. 명의대여 및 부실 점검 적발 시 자격 정지, 영업 정지, 형사 고발 등 강력한 제재를 가해 명의장사 업체가 시장에 명함도 내밀지 못하도록 철퇴를 내려야 한다.

제도는 만드는 것보다 어떻게 관리하고 운용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법률을 명시해 놓아도 현장에서 껍데기만 남은 채 작동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사기극에 불과하다. 유령 기술자의 이름을 지우고, 엄정한 실태 검증을 통해 진짜 전문가가 현장을 책임지게 하는 것. 그것이 정보통신 강국이라 자부하는 대한민국 행정이 지금 당장 바로잡아야 할 최소한의 의무이자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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