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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전시하지 않는 사람 -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으며

곽보경 / 작가·前 국회정책연구위원
단체 채팅방에 부고가 올라왔다. 무슨 말을 남겨야 할지 몰랐다. 몇 줄을 썼다 지웠다. 슬프다는 말이 자꾸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결국 짧은 문장 하나를 남기고 화면을 껐다. 누군가 이 반응을 본다면 냉정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카뮈의 뫼르소도 그런 시선 속에 있다. 어머니가 죽었다. 그는 울지 않는다. 장례식 다음 날 여자와 해변에 가고, 코미디 영화를 보며 웃는다. 소설은 이 장면들을 변명 없이 나열한다. 이 남자는 냉혈한인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인간인가.

지금 우리는 정반대의 세계에 산다. 슬픔은 전시되어야 진짜로 인정받는다. 부고 아래 달리는 댓글들, 애도의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쏟아지는 비난. 감정은 느끼는 것에서 증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누군가 울지 않으면, 우리는 그가 슬프지 않다고 판단한다. 뫼르소가 살던 시대의 재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논리다. 소설 속 검사는 그의 무표정을 살인의 증거로 제시한다. 그가 어떤 사람을 죽였는지보다,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뤄진다.

카뮈가 그리려 한 것은 감정이 없는 인간이 아니다. 뫼르소는 태양의 열기를 느끼고, 바다 냄새를 맡고, 연인의 몸을 원한다. 그는 감각에 정직한 사람이다. 다만 사회가 요구하는 각본, 슬픔은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는 각본을 따르지 않을 뿐이다. 이 거부가 부조리다. 세상은 의미를 요구하고, 뫼르소는 거기 응답하지 않는다. 그 침묵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여기서 오늘의 우리를 겹쳐 본다. SNS의 타임라인은 감정의 무대다. 기쁨도 분노도 슬픔도 즉시 게시되어야 유효하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없는 감정으로 취급된다. 그날 화면 앞에서 머뭇거리던 순간, 나는 슬픔을 느끼지 못한 게 아니라 각본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카뮈를 통해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와 감정을 느끼는 행위는 같은가.

뫼르소를 모델로 삼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태도를 낭만화하는 것도 위험하다. 그는 결국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회는 각본을 벗어난 사람을 오래 두고 보지 않는다. 소설이 정말 무서운 지점은 여기다. 뫼르소가 죽인 사람보다, 그가 울지 않았다는 사실이 재판의 중심이 된다. 판결은 행위가 아니라 태도에 내려진다.

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더 정교한 재판정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남기는 반응 하나하나는 기록되고,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와 노출된다. 침묵은 곧 그 기록의 공백으로 남는다.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관심에서 지워진다. 뫼르소의 시대에는 재판정 하나가 그를 심판했다면, 지금은 모두가 서로를 심판하는 재판정에 앉아 있다.

카뮈는 이 소설에 결론을 달지 않는다. 뫼르소는 사형 직전, 처형장에 몰려들 군중의 증오 어린 함성을 상상하며 오히려 평온해진다. 세상과의 화해도, 세상에 대한 승리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끝까지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만 남는다.

감정을 전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침묵도 하나의 언어다. 다만 그 언어를 읽어줄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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