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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신, 침묵의 다른 이름

곽보경 / 작가·前 국회정책연구위원
— 엔도 슈사쿠, 『침묵』을 읽고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다시 읽는다. 이 소설을 실천윤리의 우화로 읽는 것은 흔한 독법이지만, 정확한 독법은 아니다.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 앞에서 겪는 것은 원칙과 실용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엔도가 도달한 것은 신 개념 자체의 전복이다. 강하고 심판하는 아버지의 신에서, 약하고 함께 짓밟히는 신으로. 이 '약자의 신', '동반자 예수'라는 개념은 이후 『사무라이』, 『깊은 강』에서도 반복되는 엔도의 일관된 신학적 주제다. 그레이엄 그린이 엔도를 20세기 기독교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꼽은 이유는, 순교의 비극을 그려서가 아니라 이 전복을 문학의 언어로 완수했기 때문이다.

17세기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를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신자들에게 배교를 강요했다. 신자를 즉결 처형하는 대신, 다른 신자의 고통을 눈앞에 보여주며 굴복을 유도했다. 로드리고는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 후미에를 밟으라는 요구를 받는다. 밟으면 신자들이 풀려나고, 밟지 않으면 고문이 계속된다. 엔도가 설계한 것은 배교냐 순교냐라는 이분법 자체의 붕괴다. 신학적으로는 후미에를 밟는 행위가 배교이지만, 그 순간 로드리고를 지배하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눈앞의 고통이다. 소설은 여기서 윤리적 딜레마를 넘어, 신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고통 앞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 물음은 서사 구조에도 새겨져 있다. 소설은 로드리고의 편지, 3인칭 서술, 역사 기록의 인용을 교차시킨다. 초반의 편지체는 신의 섭리를 의심하지 않는 확신에 찬 목소리다. 후반으로 갈수록 이 확신은 침식되고, 문체 자체가 신학에서 침묵으로, 웅변에서 청취로 이동한다. 형식이 곧 주제를 수행하는 셈이다. 신이 응답을 멈추듯, 문장도 점차 단언을 멈춘다.

이 물음은 두 인물을 통해 심화된다. 페레이라 신부는 배교한다. 신앙이 약해서가 아니다.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신자들의 신음을 들으며, 자신의 기도가 그 고통을 멈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다. 이것을 신학의 패배로 읽는 것은 그 시대의 시선이다. 엔도의 시선은 다르다. 페레이라의 배교는 침묵하는 신에서, 고통받는 인간 곁의 신으로 옮겨가는 첫 균열이다. 엔도가 이 인물에 실존 크리스토방 페레이라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도 흥미롭다. 역사적 배교자를 신학적 전복의 주체로 다시 쓰는 작업 자체가, 엔도가 역사와 픽션의 경계에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 보여준다.

기치지로도 마찬가지다. 밟고 도망치고 다시 배신하는 인간이지만,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매번 돌아온다. 로드리고가 단 한 번 무너진다면, 기치지로는 그 무너짐을 생애 내내 반복한다. 엔도는 이 인물을 통해 신앙을 강함의 서사가 아니라 약함의 반복으로 다시 쓴다. 유다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이 인물이 끝내 버림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소설이 도달하려는 신학의 실제 좌표다.

로드리고가 마지막으로 후미에에 발을 얹을 때, 동판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 목소리를 신의 확정적 응답으로 읽는 것은 소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 그리스도의 음성인지, 배교를 정당화하려는 로드리고 자신의 내적 목소리인지, 엔도는 끝까지 판단을 유보한다. 이 모호함이야말로 『침묵』이 지닌 문학적 정직함이다.

17세기의 신앙은 국가 권력이 강요로 시험하는 신앙이었다. 밟느냐 밟지 않느냐는 명확한 선택지였고, 그 선택은 목격되고 기록되고 심판받았다. 지금의 신앙은 강요받지 않는다. 대신 무관심 속에서 서서히 침식된다. 아무도 후미에를 내밀지 않지만, 매일의 무신경한 선택들이 같은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17세기의 신자는 침묵하는 신 앞에서 절박하게 응답을 구했다면, 지금의 인간은 신이 침묵한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그렇기에 엔도가 그려낸 침묵은 지금 더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이 소설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원칙과 사람 사이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라는 처세의 질문 때문이 아니다. 침묵하는 초월자를 향한 신앙이, 함께 짓밟히는 존재를 향한 신앙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 때문이다. 로드리고는 후미에를 밟았지만 엔도는 그를 패배자로 그리지 않는다. 판단은 독자에게 남겨진다. 후미에는 책 밖으로 걸어 나와, 지금 우리 삶 속에서도 다른 얼굴로 다시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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