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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남는 사람

곽보경 / 작가·前 국회정책연구위원
사람은 평생 수많은 얼굴과 마주친다. 같은 교실을 쓰던 동창, 한 사무실에서 일한 동료, 여행길에 잠깐 말을 섞은 이, 화면 너머로 '좋아요'를 주고받는 지인들이 있다. 헤아려 보면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잠들기 전 연락처를 훑어보면 요즘 실제로 소식을 나누는 이름은 몇 개뿐이다. 그마저 하나도 없는 때가 있지만, 드문 일은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 관계에도 손질이 필요해진다. 이십 대에는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만으로 든든하다. 부르는 자리마다 나가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쉽게 어울린다. 사는 일이 무거워지고 하루가 아까워지면 만날 사람을 고르게 된다. 돌아오는 길이 무거운 만남, 할 말을 찾느라 애쓰는 자리, 셈이 먼저 오가는 약속부터 줄어든다.

처음엔 허전하다. 오래 연락하지 않은 이름 앞에서 내가 먼저 멀어진 건 아닌지 마음이 쓰인다. 하지만 정원사는 가지를 쳐서 나무를 살린다. 웃자란 가지를 잘라 내야 남은 가지가 굵어진다. 사람 사이도 다르지 않다.

아껴야 할 사람은 지금 내 곁에서 웃음과 위안을 건네는 사람이다. 예전에 아무리 각별했어도 지금 서로의 하루에 닿지 않는다면 좋은 기억으로 접어 두면 된다. 지나간 사람을 붙들려 애쓰는 동안 옆에 있는 사람이 소홀해진다.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 같은 사람도 지금 마음이 닿지 않는다면 애써 이어 갈 필요가 없다. 관계를 지탱하는 건 앞날의 계산이 아니라 오늘의 체온이다.

길게 가는 사이는 사는 속도가 비슷한 사이다. 형편이 닮았고, 모가 나지 않았고, 잘난 척하지 않는 사람. 말을 주고받으면 결이 맞고, 한동안 말이 없어도 편한 사람. 내 기쁜 일에 진심으로 박수 쳐 주고, 내 실패를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 버거운 하루를 견디면서도 독해지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함께 걸을 사람이다.

가늠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헤어져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운가. 그 사람 앞에서 단어를 가려 쓰느라 피곤하지 않은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앉아 있을 수 있는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 재산이 많고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라도 마주할 때마다 내가 움츠러든다면 곁에 둘 이유가 없다. 좋은 관계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지, 주저앉히지 않는다.

찻잔이 다 식도록 마주 앉아 별말 없이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사람. 몇 달 만에 걸려 온 전화도 어제 본 듯 받아 주는 사람. 눈물이 날 것 같은 날 사정을 캐묻지 않고 곁에 앉아 주는 사람. 이런 사람 하나만 있어도 덜 외롭다. 한 사람의 생은 손꼽을 만한 몇몇과의 진실한 관계로 채워진다. 관계의 값은 숫자가 아니라 진심에서 나온다.

떠나보낼 사람을 떠나보냈다면, 남은 사람에게는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어느 한쪽만 애쓰는 관계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받기만 하는 사이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그 사람 역시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귀한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만큼 누군가의 귀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도 있어야 한다.

오늘 내 안부를 챙긴 사람, 티 내지 않고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지금 가장 귀한 사람이다. 그 얼굴이 떠오른다면 짧은 안부 한 줄을 먼저 건네면 된다. 세상이 어지러워도 마음 맞는 한 사람이면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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