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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피

곽보경 / 작가·前 국회정책연구위원
몇 해 전 아프리카 종단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술잔을 내려놓더니 거기서 뭘 보고 뭘 느끼고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느낀 바는 없고 청년이 되어 돌아왔다고 답했다. 친구는 농담으로 들었는지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사진이나 보여 달라며 내 휴대전화를 끌어갔다. 화면을 넘기던 친구가 살이 많이 빠졌다고 했다. 나는 살만 빠진 게 아니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본 것은 사진에 남아 있고 느낀 것은 몇 해 지나면 흐려진다. 정작 오래 남는 건 길 위에서 조금씩 달라진 나였다. 아침마다 길을 묻고 값을 흥정했다. 어느 국경에서는 반나절을 줄 서서 기다렸고,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만으로 하루를 버틴 날도 많았다. 처음 몇 주는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속이 끓었다. 한 달쯤 지나자 그러려니 하게 됐고, 나중에는 그게 여행의 전부라는 걸 알았다.

출발할 때 배낭은 어깨가 휠 만큼 무거웠다. 대부분 혹시 몰라 넣은 것들이었다. 두꺼운 가이드북은 두 번째 나라에서 다른 여행자에게 넘겼고, 끝내 펴 보지 않은 소설책은 어느 게스트하우스 책장에 꽂아 두고 나왔다. 여벌로 챙긴 운동화는 숙소 마당을 쓸던 청년에게 주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신어 보더니 발이 꼭 맞는다며 마당을 한 바퀴 뛰었다. 종착지에 닿을 무렵 배낭은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짐이 줄수록 겁도 줄었다.

생각해 보면 마음도 그런 배낭을 메고 산다. 이미 안다고 믿는 것, 늘 해 오던 방식 같은 것들이다. 처음 보는 식당 앞에서 망설이다 결국 늘 가던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도 그런 짐이다. 처음엔 나를 지켜 주는 줄 알고 챙기지만, 어느새 그 무게 때문에 아무 데도 못 가게 된다.

에티오피아에서 버스를 놓친 일이 있다. 표에 11시라고 적혀 있어 오전 늦게 느긋하게 터미널에 갔는데,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매표소 직원이 벽시계의 11을 짚더니 손가락을 맞은편 5로 옮겼다. 그 나라는 해 뜨는 시각부터 시간을 센다. 표에 적힌 11시는 새벽 다섯 시였던 것이다. 나는 터미널 벤치에 앉아 한참을 웃었다. 그 뒤로는 안다고 생각한 것도 한 번 더 물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일, 나는 그게 도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거창한 모험이 아니어도 된다. 해 본 적 없는 일에 손을 대고, 그걸 멈추지 않는 사람이 청년이다. 쉰이 넘어 처음 붓을 잡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물 남짓에 벌써 세상 다 안다는 얼굴을 한 사람도 있다. 60대 청년이 있고 20대 노인이 있는 셈이다.

탄자니아의 한 숙소에서 일흔을 바라보는 네덜란드인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자전거로 대륙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무릎이 성하냐고 묻자 남편이 웃으며 무릎보다 고집이 먼저 닳을 거라고 했다. 고집이라는 말이 그렇게 좋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다음 날 새벽, 두 사람은 짐을 실은 자전거를 끌고 먼저 길을 나섰다. 나보다 스무 살은 많은 사람들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대륙 남쪽 끝 바닷가에 섰다. 뭔가 벅찬 마음이 들 줄 알았는데, 바람을 맞으며 처음 떠오른 건 다음엔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때는 그게 좀 싱겁다고 여겼다.

청년은 대개 앞으로 할 일을 이야기한다. 동창 모임에 나가 보면 이야기는 삼십 년 전 운동장에서 시작해 거기서 끝나기 일쑤다. 누가 싸움을 잘했고 누가 공부를 잘했는지를 몇 번이고 되짚는다. 반가운 얘기지만, 자리에서 일어설 때면 어딘지 허전하다. 지난날을 돌아보는 게 잘못일 리 없다. 다만 과거가 대화의 전부가 되면 그 사람의 시간은 거기서 멈춘다. 도전에 바쁜 사람은 과거를 거론할 틈이 없다.

돌아온 지 몇 해, 배낭은 다시 무거워졌다. 서랍에는 어디에 쓰는지도 모를 충전기 줄이 엉켜 있고, 옷장에는 언젠가 입겠다며 걸어 둔 옷이 늘었다. 누가 새로 뭘 배워 보자고 하면 입에서는 "다음에"가 먼저 나왔다. 그 다음은 몇 해째 오지 않았다. 그러니 또 덜어 내야 한다. 끊임없는 의식의 탈피만이 청년으로 사는 길이다.

그 친구와는 지금도 가끔 술잔을 기울인다. 요즘은 그가 먼저 다음엔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그날 친구에게 한 대답은 여전히 바꿀 생각이 없다. 여행이 내게 남긴 건 느낀 바가 아니라 내려놓는 법이었다. 그걸 잊지 않는 동안, 나는 아직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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